이전에 다른 곳(42 서울)에 업로드 했던 글입니다.

42 서울이라는 곳에서는 본인이 수행한 과제에 대해서 다른 동료에게 평가를 여러 번 받고, 컨펌이 되어야 통과할 수 있는 구조입니다.

이 구조에서 일어나는 문제 상황들에 대해서 학교 수업을 듣다가 문득 생각나서 쓴 글입니다.


머릿말

이 글은 저의 인상들과 생각들을 단순히 비유들로 전달하고, 공유해보고 싶어서 작성하는 글입니다.

오랫동안 전문적으로 철학이나 프로그래밍을 배운 것도 아니므로, 명확한 개념이 아닐 수 있습니다.

단순한 주관적 지식들과 의식들을 주루룩 쓰는 것이니, 이 점 유의해주세요!

개요

저는 이번 학기에 ‘윤리학’이라는 수업을 듣고 있습니다.

제 기준에서 철학 수업의 큰 특징 중 하나가 고전을 읽고 본인이 생각해보는 것인데요.

이 수업에서는 맨 처음 ‘니코마코스 윤리학’을 강독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라는 철학자의 저서인데, 최고 선(가장 좋은 것)으로서의 행복이 뭔지, 그 행복을 달성하기 위해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하는지에 대한 실천적인 방법을 제시하는 책입니다.

이 실천적인 방법에서 중요한 개념 중 하나가 ‘중용’입니다.

중용(中庸, mestoes)

중용을 잘 이해하려면, 아리스토텔레스가 제시하는 탁월성에 대해서 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제가 이해한 ‘탁월성’이란, 이성을 가진 존재(인간)은 행복(최고 선)을 달성할 수 있는 씨앗을 갖고 있고, 이를 지향하는 ‘좋은 습관’들을 통해서 길러질 수 있는 실천적인 능력입니다.

‘니코마코스 윤리학’의 유명한 구절에서 탁월성과 중용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너무 많이 할 수도 있고, 너무 적게 할 수도 있지만, 양자 모두에 있어서 잘 하는 것은 아니다.”
“마땅히 그래야 할 때, 또 마땅히 그래야 할 일에 대해, 마땅히 그래야 할 사람들에 대해, 마땅히 그래야 할 목적을 위해서, 또 마땅히 그래야 할 방식으로 감정을 갖는 것은 중간이자 최선이며, 바로 그런 것이 탁월성에 속하는 것이다." - 니코마코스 윤리학 2장 중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중용은, 넘침과 모자람의 중간 즉, 산술적인 중간(1과 5 사이의 3)이 아니라 마땅히 그러해야하는 상황들에서의 마땅히 그렇게 하는, 제 생각에는 어쩌면 연속적인 것들 사이의 중간인 것 같습니다.

의문점과 내 생각

이 부분을 교수님께서 열심히 강독하시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들이 뭐 이러면 중용이 여러 개일 수 있는 것 아니냐고 하시는데,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렇다기보다는 그 상황에 마땅한 하나의 중용이 있다고 하는 것 같아요.”

저는 이런 식이면 적어도 중용을 달성했다고 생각하기는 어렵겠구나.. 싶었습니다. 왜냐하면, 누구나 다른 사람의 주관을 ‘완벽히’ 이해할 수 없듯, ‘마땅히’의 명확한 기준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것 처럼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아리스토텔레스 아저씨가 말하고자 했던 바가 무엇이었을까.. 곰곰히 생각해보니, 오히려 알 수 없음으로써 중용이라는 것이 추구하는 의미가 더 잘 발현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중용을 만족했다’라고 할 수 있는 순간은 있을 수 없으므로, 계속 중용을 향해 달려갈 수 밖에 없게끔 한 것이 아닐까하고 생각이 들었습니다.

문득 든 생각

그러다가 문득, 정말 뜬금없게도 경사하강법과 42에서의 평가가 생각이 났습니다. 저는 망상을 잘하는 편이라서요..



전 잘 모르지만, 대강 아는 경사하강법은 머신러닝에서 사용되는 용어인데요, 그냥 제가 이해하고 있는 의미로써만 전달해보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올바른 지점을 정해놓고, 넘치면 줄이고, 모자라면 늘려서 최종 지점에 수렴하게끔 계속해서 학습시키는 방법”

이 방법 말고도 학습시키는 방법이야 많겠지만, 먼저 떠오른 이유는 아마도 final value의 왼쪽은 (-), 오른쪽은 (+)여서가 아닐까 싶습니다. 결국 어떠한 지점을 정해놓고, 비록 우리는 잘 모르겠지만, 넘침과 모자람 사이에서 수렴하는 지점을 찾고자 노력하고, 실천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42에서의 평가가 생각이 나더라구요. “넌 과제의 디테일이 모자라”, “넌 너무 넘치게 평가해” 등등과 같은 얘기들이 떠올랐습니다.

평가와 중용

아마도 평가에는 ‘이론상’ 중용은 있는 것 같습니다. 물론 평가자와 피평가자가 서로 알 수 없다는 사실이 문제를 일으키는 지점인 것 같기도 하구요. 어쩌면, 각자의 상황에서 각자가 생각하는 중용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각자가 생각하는 ‘이정도면’, ‘이정도는’ 같은 부분들이 위에서 언급했던 ‘마땅히’와 같은 부분이 아닐까 싶네요. 지금까지 이너서클을 진행해오면서 다른 분들의 평가에 대한 가치관과 수많은 얘기들을 많이 들었습니다. 서로 만족할 수 있는 평가들도 있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들도 분명히 존재했습니다. 우리는 과연 평가에서 중용을 찾을 수 있을까요?

제 의견은 “그럴 수 없다” 입니다. 위에서 제가 생각했던 것을 말씀드렸듯, 저는 평가 자체에서의 중용은 찾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 지향점을 찾기 위해 넘침과 모자람을 서로 조율하고, 얘기해보면서 중용에 가까이 다가가게끔 진행하는 것이 평가태도의 중용이라고 할 수는 있을 것 같습니다. 평가자 입장에서 피평가자의 모자람은 피평가자 입장에서 평가자의 넘침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 부분에서 동료평가의 오펜스와 디펜스가 이루어집니다. 제가 봐온 서로 잡음이 있던 평가들의 대부분은 평가자와 피평가자가 서로가 원하는 ‘마땅히’의 지점을 설득시키지 못한 데에서 오는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본인이 가지고 있는 ‘마땅함’이 너무나 명확하다고 생각해서, 상대방의 ‘마땅함’은 옳지 않다는 생각을 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어쩌면 평가태도의 중용을 좇으면서 평가의 중용도 어느 정도 확보할 수 있지 않을까요?

제 기준에서는 평가 자체의 성패를 떠나서, 일종의 게임과도 같은 42의 동료평가 시스템을 고려해보면, 어쩌면 서로가 다른 기준을 갖고 있는 것을 입 밖으로 꺼내어서 서로 이리저리 재보고, 상대방을 설득시킬 수 있는 것이 더 중요한 것처럼 느껴집니다. 왜 이 에러처리를 해야하는지, 안 해야하는지 코드들의 디테일에 대한 기술적인 이유도 중요하지만 왜 그렇게 하려고 생각했는지를 얘기해보는 것이 더 주요한 것으로 느껴집니다. 더 나아가서는, 본인이 생각하고 있는 평가기준 혹은 이 과제에 대한 본인이 생각하는 ‘마땅함’의 기준을 더 명확하게 얘기해보고 서로 조율하는 것이 42에서 동료평가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시사점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맺음말

위에서 이래저래 흘러서 도달한 결론은, 결국 평가 자체에 대한 명확한 지점을 찾기는 힘들 수 있지만 동료평가를 진행하면서 서로가 메타적으로 어떠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얘기해보는 방식에 초점을 맞춰서 평가를 진행하면 억까와 성패에 따른 스트레스보다는, 더 좋은 평가를 위한 탁월성을 기를 수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입니다.

본인만의 생각이 있으시다면 다른 분들도 볼 수 있도록 얘기해주시면 더욱 감사할 것 같습니다.

잘 정돈된 글은 아닌 것 같지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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